Chapter 9. 팀을 꾸리다
내 MBTI는 ISTP이다. 이건 내가, 인터넷 어딘가 에서 보았던 매우 직관적인 해석을 따르자면, 집에 쳐박혀 있는(I), 걍 그런갑다 하는(S), 이과 감성(T), 게으른 사람(P)라는 뜻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유행이 지난 MBTI라지만, 내가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최근 더 몰두하는 건 MBTI를 구성하는 네 글자들 사이의 궁합이다. 예를 들어, N과 F가 만난 NF 유형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데 특화되어 있다. 이들은 결코 누군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늘 자신들만의 해석을 덧붙여 있지도 않은 행간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마치 수능 시험에서 오래된 시를 지문으로 내고 저자는 어떤 의도로 이런 시를 썼을까를 문제로 냈는데, 나중에 한 기자가 정작 그 저자를 찾아가 답을 물어보니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답변을 들은 것과 같다. (놀랍게도 실화이다.) 이와 반대로 ST는 세상 까칠하기 그지 없는 성격인데, 그렇지 않아도 디테일을 보는 시각(S)을 가진 사람이 근거 중심의 사고(T)를 하니 NF와는 상극을 이룬다.
하지만 그 미스매치의 정점에 있는 것은 NF와 J의 조합, ST와 P의 조합이다. J는 계획적인 성향인데 상상의 나래(NF)를 계획적으로 편다는 건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반대로 ST는 논리와 분석을 중시하는데 즉흥적(P)이라는 것 또한 매우 심각하게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런 이유로 보통 STP는 극도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일잘러이지만, 일단 흑화하면 말싸움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에 I 성향이 더해진 나는 가장 빠른 방식으로 혼자 뭔가를 처리하는 것에 최적화 되어 있다.
블로그 연재 초기부터 한 말이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극도의 소수 정예를 좋아한다. 꽤나 오랫동안 가능만 하다면 1인 바이오텍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꿔왔다. 아주 오래 전 기술이전 논의를 위해 글로벌 회사의 시니어 리더를 만났는데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들고 사이언스와 개발, 경쟁 비교, 약물 가치평가까지 혼자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팬이 된 적도 있다. 나의 페르소나(주. 마케팅 용어로 가상의 목표 모델을 뜻함)는 전 분야에 걸쳐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가진 완벽한 육각형 인재이다. 출신과 배경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갖지 못한 영역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 채우는 건 본인의 몫이다.
안타깝게도, 경험이 쌓이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내가 목표로 하는 모습으로부터 지금의 내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를 보게 된다.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 있더라도 꿈을 꾸는 건 꿈꾸는 자의 자유이다. 문제는 꿈을 갖는 것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다는 거고, 당장의 갭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게는 좋은 팀이 필요했다.
사람을 뽑았다. 꽤 괜찮은 초기 투자를 받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돈되지 않았다. 조직을 재편하고 본부장과 팀장을 뽑았다. 조직의 성과는 나아지지 않았다. 본부장과 팀장을 바꿔봤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조직의 아래를 채워봤다. 회사가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뭔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원하는 모습에서 한 발 씩 더 멀어져 갔다. 결국 참다 못해 작년 상장 철회 이후 리셋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길을 잃었다. 물론 아주 잠시.
나에게 좋은 팀이란 소수 정예이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나와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의 이 지랄맞은 성격을 만족시키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새롭게 팀의 기준을 세웠고,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똑똑함의 문제가 아니라 핏(fit)의 문제였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은 문제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2018년 회사에 합류한 이래로 자금조달(F)과 사업개발(BD), 임상개발 및 조직 운영을 모두 도맡아 왔다. 지금까지 이룬 것들도 결코 작지 않지만, 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부터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결국 내가 집중해야 할 영역은 BD였고, F를 떼어내기 위해 좋은 CFO가 필요했다. 오래 전 함께 일했던 헤드헌터들에게 소개를 요청했다. 많은 이력서가 들어왔고, 그 중 나의 까칠함을 유달리 좋아하는 한 헤드헌터에게 받은 이력서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 CFO를 채용했고, 나는 7년 만에 직책에서 F를 떼어내고 CBO가 되었다. (미국 친구들이 물었다. CFBO에서 CBO가 된 것은 승진이냐 강등이냐.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했다. 뭣이 중헌디.)
다음은 임상개발의 차례였다. 물론 지금까지 임상 운영상의 실무적인 부분은 Arlo가 주로 맡아서 했지만, 주요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은 내가 주도해왔다. 그간 버거웠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마침 지난 2년간 컨설턴트로 함께 일해온 임상 전문가가 있었다. 2년이면 합을 맞추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그와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CMO를 영입했다.
그렇게 꽤 괜찮은 팀이 만들어졌다. 아니,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개별 인력의 이력도, 함께 일하는 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맨 윗자리가 비어 있었다. 대표님과 내가 지난 8년간 이끌어 온 이 구도에 좀 더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새삼스럽지만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8년간 찾아왔지만 적합한 인물이 없어서 채우지 못했던 그 자리를 더 이상 비워둘 수 없었다.
너무도 중요한 자리였기에 그만큼 고민이 따랐다. 하지만 애당초 후보자가 많은 자리가 아니었다. 많기는 커녕 지난 8년간 단 한 명의 적합한 사람도 찾지 못했던 자리였다. 고민은 무의미했고, 그 색이 바랬다. 그러던 중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 다양한 운과 때가 하나로 모여, 마치 고대 로마 대성당의 벽면을 가득 채우는 벽화에 등장한 주인공의 마지막 눈알을 그려 넣듯, 그렇게 화룡점정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은 심정으로, CSO를 영입했다.
새로 만든 IR 장표의 리더십 페이지가 빼곡하게 찼다. 그 안에 담긴 개개인은 서로 너무도 다르지만 전체로는 매우 균형 잡힌 모습으로. 노벨티노빌리티에서 일한 지 8년여만에 처음으로, 마침내, 드디어, 이윽고, 팀이 갖춰졌다. 며칠 전에도 이 회사에 합류한 이후 처음으로 외부 미팅에 내가 참여하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스스로를 보며, 나도 이제는 팀이 생겼다는 것이 실감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함께 맞이할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좋은 팀에서 온다. 이 당연한 말을 현실로 만드는 데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원하는 페르소나를 혼자 이룰 수 없다면 팀으로 이뤄보자. 어쩌면 이제는 가능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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