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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BO] 조부사장의 바이오텍 탈출기 - Chapter 6

NVNB 2024. 11. 11. 09:45

Chapter 6. 정면돌파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의 어느 날, 답답한 마음으로 여느 때처럼 페이스북을 눈팅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던 컨텐츠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Under Armour의 2020년 마케팅 슬로건, The only way is through.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정면돌파만이 유일한 길이다 정도 되려나.  

 

Under Armour는 “3대 500이하 금지”라는 인터넷 밈(meme)으로 잘 알려진 스포츠 브랜드이다. 여기서 3대란 벤치프레스, 스쿼트, 데드리프트를 뜻하는 말로, 3대 500이하 금지는 위 세 가지 종목의 무게를 합산해 500kg이 넘는 사람들만이 Under Armour를 입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2020년이면 아마도 Nike가 Just Do It이라는 세기의 마케팅을 통해 스포츠 브랜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이에 후발 주자로 나선 Under Armour 입장에서는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고민했을 테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Nike를 이길 수 있는 전략이 없게 되자 스포츠 정신으로 시장을 정면돌파 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The only way is through 라는 슬로건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뭐, 아니면 말고. 여튼 2020년과 비교해 지금의 Under Armour는 꽤나 선방해 헬창이라고 불리는 운동 중독자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Under Armour의 슬로건이 내가 당시 깊이 빠져 있는 고민에 대한 답을 주는 것 같아서였다. 이미 언론에 발표된 대로, 우리는 지난 7월 말 신약 개발 회사 중에는 그 귀하다는 기술성 평가 A, A 등급을 맞았다. 상장에 청신호가 켜졌고, 이를 좋게 본 투자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 pre-IPO 투자유치 역시 꽤나 호황을 이루었다. 당시 목표 금액은 300억 원이었는데 오버부킹이 되었다. 만약 투자유치가 이대로 마무리되어 300억 원을 모집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최근 2년간 최대 규모의 pre-IPO 투자유치를 한 기업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모든 일들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 했다.

 

일이 복잡해진 건 NN2802의 파트너사인 Acelyrin이 지난 8월에 열린 2분기 실적발표에서 NN2802의 개발 중단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NN2802는 당초 2022년에 ValenzaBio라는 회사에 기술이전 되었는데, 이듬해에 Acelyrin이 ValenzaBio를 인수하면서 손이 바뀌게 되었다. Acelyrin은 지난 5월 NN2802의 Ph1a 임상시험을 잘 마쳤는데, 이후 내부 구조조정에 따른 경영상의 판단으로 인해 NN2802의 자체 개발을 중단하고 재라이센싱(sub-licensing)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은 바이오텍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악의 타이밍에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국내에서 비상장 바이오텍이 글로벌 기술이전을 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상장 이전에 이전한 기술의 개발이 파트너사의 결정에 의해 중단된 것은 아마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한경에서 자세히 기술해주신 것처럼(관련 기사) 기술이 반환된 것은 아니고 재라이센싱을 추진하는 것이라지만, NN2802의 기술이전 실적은 앞서 우리가 기술성 평가에서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였으며 투자자들이 우리의 상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이유 중 하나였다. 따라서 Acelyrin의 이번 결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많은 것들의 의미를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사이에 많은 투자자들이 결정을 번복했다. 고루한 표현이지만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는 말이 무척이나 실감났다. 아쉬웠지만 원망할 수는 없었다. Pre-IPO는 기존의 시리즈 A, B와는 달리 자본시장에 근접한 투자이므로 투자자들이 자본의 논리로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모집 금액은 100억 원 아래로 줄어들었고, 순탄해 보였던 pre-IPO 투자유치는 난항에 빠지게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시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기존 투자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기존에 투자를 검토했던 신규 투자자들에게는 Acelyrin의 이번 결정이 우리 회사의 fundamental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어필하고 성장 가능성에 대해 설득했다. 최대한 많은 신규 기관들을 만나 IR을 진행했다. 평소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주변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박교수님도 아껴둔 카드 몇 장을 꺼내 기꺼이 사용했다. 하지만 놀랍도록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는다는 무기력함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를 좋게 봤던 모 투자자는 이번 일이 있은 후 pre-IPO 펀드가 아니라 창업 7년 이내의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초기기업 펀드로 투자하는 플랜 B를 검토했지만, 불과 한 달 차이로 우리는 해당 조건에 맞지 않았다. 온 세상이 우리의 펀딩을 방해하는 듯 했다.

 

The only way is through라는 문구가 내 눈길을 끈 것은 대략 그때쯤이었다.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잠시, 이내 빠르게 생각이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 투자자의 결정이 자본시장의 논리를 따른다면, 현 시점에서 설득과 노력으로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일단 시간을 버는 것, 2) 벌어놓은 시간이 끝나기 전에 추가적인 사업 실적을 만드는 것, 3) 이를 통해 상장 가능성을 다시 높여 투자자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것, 그리고 매우 안타깝지만 4) 이 모든 계획이 통하지 않을 상황을 가정해 살아남는 방법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1)~3)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4)는 처음부터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런웨이가 불과 두어 달 밖에 남지 않았기에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어쩌다가 런웨이가 두 달 밖에 남지 않게 되었는지 묻고 싶겠지만, 희한하게도 비상장 기업의 투자유치는 아무리 서둘러 시작해도 꼭 턱 밑까지 차야만 끝이 난다. 그렇게 턱 밑까지 꽉 채워 300억 원을 모집했는데 그게 막판에 빵꾸가 나면서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아직 모든 투자자가 등을 돌린 것은 아니므로 최악의 상황을 고민할 단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일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다.  

'런웨이'라고 하면 패션쇼 무대가 떠오르지만, 벤처회사에서는 보유 자금으로 생존 가능한 기간을 뜻한다.

 

차입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를 쓰고 싶지만, 자본잠식 상태인 재무제표로 사업을 연명해 나가는 비상장 바이오텍에게 돈을 빌려줄 금융권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관 주주들 중 금융권 계열사에서 적극적으로 알아봤지만 예외는 없었다. 조금 여유가 있는, 몇 안 되는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한 형이 5억을 빌려준다고 했다. 오케이, 일단 한 달 운영비는 구했고. 박교수님은 개인 대출을 신청했다. 금액이 얼마나 될까 싶었지만 지금은 작은 힘이라도 모아야 할 때이다. 아무런 말없이 그냥 쓴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앞서,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부터 움직였던 경영관리본부장님은 7월 말과 9월 말, 두 번에 걸쳐 총 28억 원을 모으는 한 방을 보여줬다. 심지어 단순 대여가 아니라 추후 출자전환을 통해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조건이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리면 이런 느낌이려나.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었고, 이걸로 일단 한 숨 돌렸다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미처 하지 못한 것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지 않아도 큰 본부장님의 체구가 그날따라 더 크게 느껴졌다.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힘들게 구한 돈으로 최대한의 런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바이오텍의 비용 구조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개발비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지출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연구비는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들지 않을뿐더러 연구 소모품은 재고가 조금 있었기에 당장 큰 돈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절감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절감했을 때 가장 직접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인건비였다.

 

사실 인건비를 근본적으로 절감하는 방법은 인원을 줄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용시장이 유연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직원을 해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적당한 절차를 거치면 가능하다. 하지만 업계 전반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물론 다들 상황이 어려우므로 막상 우리가 직원을 내보냈을 때 비난을 받을 여지는 적었지만, 혹시라도 해고당한 직원이 갈 곳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해고라는 쉬운(?) 길을 두고 임직원의 동의를 얻어 한시적으로 월급을 줄이는 더 어려운 길을 택했다. 한시적인 월급 삭감이 어려운 이유는 모든 임직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솔선수범을 위해 한시적으로 경영진은 50%, 관리자는 20%, 직원은 10%의 삭감을 결정했다.

 

이전 경험을 통해 배운 교훈 중, 사람의 본성은 본인의 이해관계를 침범당하는 상황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있다. 아무리 성격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본인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오는 상황이 발생하면 숨겨진 본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를 잘 알기에, 설득을 위해 전 임직원이 모이는 월간회의를 통해 필요성과 플랜을 발표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감정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하지만 내용은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좋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속으로는 만약 한 명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월급 삭감은 진행할 수 없기에 누군가를 내보내야 한다는 불편함이 고개를 들었다. 애써 불편함을 억누르며 경영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런 상황이 오게 된 것에 대해 사과했다. 나 또한 피해자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플랜은 전 임직원의 동의를 얻어 통과되었다. 나는 일할 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에 당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무도 몰랐지 싶다. 어려운 길에 선뜻 동의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직관에 반하는 결과에 대한 놀라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시간 내에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면 결국에는 미뤄두었던 쉬운 길을 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한 데 섞여 복잡한 심정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한 달의 시간을 추가로 벌었고,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우리의 의지로 진행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질적인 사업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거야 말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앞선 개발 중단 결정에도 불구하고 NN2802는 Acelyrin이 아직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파이프라인의 BD 활동에 속도를 냈다. 복수의 파이프라인에 대해 의미 있는 논의가 여러 건 진행되고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어떤 것도 낙관할 수 없었다. 어차피 기술이전이란 구매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러던 중 예상치 못했던 타이밍에 (이번에는 좋은) 이벤트가 발생했다. 내용상 현 지면에 자세한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지만, Acelyrin의 결정에 의해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던 투자자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운이 좋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애당초 운이 좋았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에게 투자를 하고 싶었지만 Acelyrin 사건 이후 경영진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던 한 심사역은 나를 대신해 통쾌해해주었다. 이후 상황은 빠르게 다시 반전되었고, 투자유치는 이벤트 발생 후 불과 일주일만에 다시 오버부킹이 되었다. 2024년 11월 8일,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던 이번 pre-IPO 투자유치는 그렇게 233억 원으로 마감되었다.

 

The only way is through.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돌파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이번 정면돌파는 모든 서사와 타이밍 상 꽤나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투자유치를 잘 마친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을 또 새롭게 배웠다. 그 중 가장 갚진 것은 어쩌면 본인의 이해관계가 얽히면 사람은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기존 경험을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하나 얻었다는 것. 사람에 대한 관점을 이렇게 또 하나 배우고 한 단계 성장해간다. 이번 투자유치의 공을 어려움에 동참해준 모든 노벨티노빌리티 구성원들에게 돌린다.